• 勅命巨役
  • 2025. 3. 7. 17:22
  • 보라색 교복을 맞추던 날이 아직도 선명하다.
    몸에 꼭 맞는 것을 입어보면서 부모님과 웃고 떠들던 것도 선명하다.
    멋진 우마무스메들의 대기록을 봐 오면서 나도 저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꿈꾸던 것조차,
    선명한 기억이다.
    그래서, 더욱이 고통스러운.

    상자가 엎질러졌다. 오르페브르의 시선이 일순간 한곳에 집중되었다. 상자의 내용물을 주워 담으려던 장갑 낀 손이 뻣뻣하게 되었다. 나는 절규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너야? 왜 네가 아니면 안 되는데? 그러나 허락되지 않는다. 비명 한번 나오지 못한다. 바닥에 흰색과 붉은색, 보라색이 섞인 천이 어지럽게 늘어져 버린다. 사용감이 남은 트레센 학원의 교복. 그게 내 옷장 맨 위 편에 먼지 쌓이도록 둔 상자의 내용물이었다. 아직 찌든 때가 다 지워지지 않은 신발. 자잘한 세월의 흐름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트레센 학원의 교복이 바닥으로 처참하게 떨어진 상자의 내용물이었다.

    오르페브르가 잘못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잘못은 모두 내게 있었다. 오르페브르와 주말에 외출 일정을 잡은 것도, 내 준비가 생각보다 늦어져서 오르페브르가 내 트레이너 기숙사까지 찾아온 것도. 내가 급히 준비한다고 옷을 조금 힘을 주어 꺼낸 것도, 그 과정에서 옷장이 조금 기우뚱거려서 옷장 위에 치워두고 잊어버렸던 상자를 떨어트린 것도. …그리고 그걸 큰 소리에 내가 다쳤을까 걱정해 달려온 너가 봐 버린 것도. 그리고 내가 그동안 트레센 재학생이었단 사실을 숨겼던 것도.
    …전부 내 잘못이야.

    나는 자만하고 있었다.
    나는 착각하고 있었다. 내가 엄청나게 특별할 거라고. 내가 압도적으로 누군가와 다를 거라고. 나는 다른 이들과 다를 거라고.
    아니, 사실 이미 알고 있었다.
    2학년 때부턴 레이스 준비보단 레이스 계열로 진학해서 대학에 갈 준비를 시작했다. 평소에도 무언가를 적고, 수기로 기록을 남기고, 그 기록을 몇 번이나 들여다보는 걸 좋아하는 나는 되려 이 쪽이 더 잘 맞았는지 그런 것에 신경을 조금 더 쓰기 시작한 것만으로도 성적이 올랐다. 사실 이미 그때부터, 칭찬을 받았다고 좋아하며 점점 레이스 쪽에 대한 준비를 소홀히 하기 시작할 때부터 알고 있었다. 난 레이스에 재능이 없다고.
    사실 어찌 보면 흔한 일이다.
    …레이스에 재능이 없는 우마무스메는 정말 많다. 선발 레이스 한번 제대로 못 이기는 우마무스메도 많고, G3는 커녕 데뷔전도 이기지 못하고 미승리전을 전전하다가 일찌감치 계약이 끝나버리는 우마무스메도 트레센에선, 흔하다. 그래서 일찌감치 레이스 쪽으로는 포기하고, 아예 레이스가 아닌 스포츠 관련 직종을 목표로 잡고 트레센으로 진학하는 우마무스메도 꾸준히 존재했다. 내 전에도, 내가 졸업한 후에도.
    …나는 그 사이에 어설프게 걸쳐 있었다. 레이스 관련 직종으로 갈 준비를 마쳤으면서도 결국 마음을 레이스에서 놓지 못했다.
    그렇기에 졸업은 나에게 내려진 벌이었다. 결국 너는 레이스의 세계에 발을 들일 자격도 없었다고. 결국 재능이 없는 너에게는 그것이 끔찍한 오만이고 오판이었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거리에서 양말 신은 발로 집까지 걸으며 엉엉 울었다. 집에 푹 젖은 몸을 이끌고 들어와 푹 젖은 옷을 벗어던지고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다가 밖으로 나와 옷을 입자마자 머리도 말리지 못하고 기절했다. 그 후 일주일은 앓아누워서 거의 기억이 없다. 부모님이 거의 울 뻔했다는 것 밖엔. 아직도 부모님은 겨울이랑 장마철만 되면 창문은 잘 닫고 자니, 난방은 잘하고 있니, 덥다고 이불을 걷어차면 안 된다…며 매번 걱정 섞인 안부 전화를 해서, …이건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지만.

    그래, 일주일 정도 실컷 앓고 일어난 후엔 어느정도 침착할 수 있었다.
    마지막 미련을 포기할 각오가 섰다는 것이다.
    트레센 학원의 교복은 제대로 세탁하고 상자에 넣어버렸다. 그래도 공부에 집중한 것이 아예 헛되진 않았는지 괜찮은 대학에 진학하기는 쉬웠고, …그 과정에서 바뀐 꿈에 따라 진로를 정했다.
    지인들과 친구들은 걱정했지만, 난 정말로 괜찮았다.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 이기지도 못하고, 아니, 레이스조차 뛰어보지 못한 사람. 그러면서도 성적은 꽤 잘 받았던 사람. 동시에 우마무스메여서 인간보다도 우마무스메의 몸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트레이너라는 직업을.
    우마무스메의 투쟁심 때문에 트레이너를 할 수 없다, 는 잘 알려진 이야기는 헛소리라고만 생각했다.
    애초에, 애초에 압도적인 차이가 벌려져 있다면 불타는 건 투쟁심 따위가 아니라,
    …압도적인 무력감과 존경심이라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그런 주제에 왜 트레센 교복을 버리지 못했느냐고.
    굳이 왜 이런 곳까지 가져왔냐고.
    본가 구석진 곳에 숨겨두거나, 그냥 버리고 왔어도 될 것을. 왜 여기까지 끌고 왔느냐고. …되물어도 답은 없다. 머리가 하얘지며 순식간에 주위의 풍경이 무너졌다. 속이 울렁거리고 내장을 전부 게워낼 듯 해서 입가를 막았다. 숨이 너무 가쁘고 머리가 핑 돌았다. 숨이 모자라서, 아니면 과다해서? 모를 일이다. 무서웠다. 무엇이 무서운가? 그리 물어보면… 모르겠다는 답밖에 할 수 없지만. 아무튼 지금은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엇에 대해, 왜?라는 기본적인 의문도 들지 않는다. 덜덜 떨리는 몸을 억지로 끌고 움직여 도망을 가려고 했다. 다음 순간 손목을 잡혔지만.

    “네 놈, 지금 어디로 가려는 거지…!”

    약간의 노기가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고 난 직후 봤던 얼굴이 실수했다, 는 빛을 띄고 있던 것까지만 기억이 난다. …손을 억지로, 정말 낑낑대며 뿌리쳤다. 아니, 그녀가 놀라 놓아준 것에 가까울 것이다. 아무리 내가 우마무스메라지만, 본격화 시기의 현역 레이스 선수 우마무스메가 진심으로 붙잡고자 하면 얼마든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내가 정말로, 패닉 탓에 그녀의 예상을 뛰어넘는 힘을 낸 것일 수도 있다. 그녀에게 약간 언성을 높인 것도 같고.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픈 손목을 붙들고 뛰었다. 감싸 쥔 손목의 통증도, 들뜬 신발 탓에 뛰기 힘든 것도 다 남의 일 같다. 정신없이 사람이 적은 트레센 학원으로 뛰어들어가 숨이 차다 못해 폐가 아프고 숨을 쉬는 것이 고통스러운데도 발이 멈추질 않는다. 무섭고 무서워서, 머리가 하얘져서 어디로 가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어서.

    무서워. 무서워. 어떡하지? 어떡해야, 무서워. 엄청 무서워. 어디로 가야 하는데, 더는 못 뛸 거 같은데. 어디로 가야- 까지 생각한 순간, 하앴던 눈앞에- 순식간에 색이 돌아오며,

    으아아아아악-?!?! 멈추라니, ㄲ-!!
    엣, 언, 으와아아아아아?!?!?
    어이, 호타- 야!!!!!!

    …이후, 쾅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이 가물가물 하다가… 그대로 기억이 끊겼다.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오는 자판 소리에 눈을 뜨면, 일어났다, 하고 경쾌한 목소리로 반겨오는 사람의 목소리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차는 목소리. …에어 샤커, 그리고 우메시타 호타루. 그녀들을 모르지 않는다. 모를 리가 없다. 애초에 오르페브르의 ‘국화상’ 때도 만난 적이 있으며, 내 선배의 선배, 기도 하니까. 나름대로 원년 선배 입지에 있는 사람인데 오히려 그다지 고평가를 받지 못하는 모습이 이상하다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녀의 행동거지를 보고 나서 단박에 납득했지만. 차를 타 오겠다고 하다가 바닥에 엎어지는 그녀를 에어 샤커가 이젠 익숙한 듯 한숨을 쉬며 일으켜 세워주는 모습은 역시…대단하다고 할까.

    결국 차는 종이컵에 오렌지 주스(그마저도 호타루가 한 개는 엎어서 치우는 것을 도왔다,)로 대체된 채 어색한 삼자대면이 되었다.

    “그래서…좀 진정됐어? 나는 그대로 쿵, 하고 기절해서 기억은 안 나지만 샤커가 말하기로는 숨을 쌔근거리다가 비틀거리면서 그대로 주저앉아 기절했다고 그러던데. 이야, 얼굴이 정말 하얘져서 겁먹은 듯이 달리길래 막아야겠다!라고 생각했는데 목소리 못 들었을 거라곤 생각 못 했어~ 나, 바보라 일단 대책 없이 앞을 막고 봤거든.”
    “진짜 진짜 죄송해요… 안 다치셨어요?”
    “응응! 완전 튼튼해! 아, 다만 샤커에게 감사 인사는 해 둬. 너랑 나 데리고 트레이너실로 옮겨서 눕혀줬거든.”
    “네에…???”
    “하아… 로지컬 하지 않아…”
    “히약?!”
    “잠깐 샤커~! 좀 더 친절하게 해 줘! 저기, 그… 실버 폰타인, 이였지? 실버 짱이라고 부를게? 실버 짱은 저번에 샤커랑도 만났지? 그 ‘국화상’ 때 말이야. 아무튼 둘이 아는 사이면서 왜 그렇게 무섭게 행동해~! 실버 짱은 나랑 충돌하기 직전까지도 귀신이라도 본 거 같은 얼굴하고 엄청 무서워하고 있었는걸!”
    “하아… 알겠어.”
    “아뇨… 그건, 괜찮은데… 그게, …오르페브르는…”
    “…괜찮아, 오르페브르는 여기엔 못 와. …올 까봐, 불안해서 계속 도망 다녔던 거지? 아까 보니까 계속 두리번거리면서, 헉헉대면서도 불안해하는 기색이 보였거든. …무슨 일 있었어? 담당 우마무스메랑.”

    정확히 논점을 짚은 그녀의 말에 순간적으로 몸이 긴장한 듯 굳은 것을 보자마자 이내 표정이 풀어지며 이야~ 이 일을 오래 하다보면 이런 것 정도는 금방 금방 보인다니까! 라 웃어 보이는 그녀를 보곤 실버는 제 약간의 당혹감을 잊으려는 듯 손에 쥔 종이컵에 든 액체를 전부 목으로 넘겼다. …이 트레이너, 남들이 아는 것보다 엄청난 거 아닐까? …나, 횡설수설하고 당황하고 패닉 상태였으니까 그걸 수습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없을 텐데, 그 잠깐의 정보로 그걸 추리해 낸 거면… 목에 걸린 듯이 나오지 않는 말을 전하려고 뻐끔거리다가, …이내 큰 결심을 했다. 비웃어질지도 몰라. …어쩌면 별 것도 아닌 일이라며, 비난받을지도. 그렇지만… 그래도…

    “…실은, …담당에게 들키고 싶지 않던 비밀을 들켜 버렸어요.”
    “에, 그거 나도 그런 적 있어.”
    “아, 그런… …네?”

    …단숨에 자기의 예상을 뛰어넘는 말이 나와 버렸지만.



    “헤에, 트레센 학원 재학생이었구나! 우와, 전혀 몰랐어! 대단하네~”
    “아뇨…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닌데요. 데뷔전도 치러보지 못했는걸요.”
    “그렇게 저평가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보다도, 그렇게 된 일이었구나. …뭐, 이해는 가네. 놀랐겠다. 실버 짱은 겁먹으면 도망치는 타입이지? 음, 음. 확실히 이해가 가.”
    “…역시 오르페브르는 실망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저런 이야기를 지금껏 숨겼으니까, 분명. …그리고 저런 한심한 지팡이 같은 건, …누구도 가지고 싶어 하지 않을 거 같아서…”
    “엥?”
    “트레센 학원에서도 성과도 내지 못하고, …제대로 설멍도 못하고 도망치고. 어울리지도 않고 겁도 많고, 전 정말 최ㅇ-”
    “…야.”
    “으헥?! 네??!”
    “…뭘 그렇게 놀라고 있는데. 어이. 똑바로 들어. 트레센 학원 재학생 중에 성공적으로 데뷔하고 성과를 내는 우마무스메는 정말 적어. 통계로 봐도 10% 내외. …그리고 그 90%중에 레이스가 아닌 다른 진로 쪽으로 성공적으로 간 애가 얼마나 될 거 같냐?”
    “엣? 에?”
    “그러니까!! 너 생각보다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애초에 레이스 쪽이 워낙 동경의 대상인 건 알겠는데… 네 성과를 그렇게 과소평가 할 건 없지 않냐는 거지. 너, 애초에 중앙 트레센 경쟁률이 얼마인지는 생각해 본 적 있냐?”
    “맞아 맞아, 그리고 사실 말이야, 나도 샤커에게 내가 절대 보여주기 싫은 비밀 들킨 적 있다? 솔직히 나는 경우가 좀 다르다고는 생각하지만… 일단 객관적으로 볼 땐 숨길 이유가 없는 성과였어. …나에겐 숨기고 싶은 일이었지만.”
    “…하아…그땐 진짜, 놀랐다고 해야 할지 짜증 난다고 해야 할지…”
    “3년이 끝나가던 무렵이었어. 완전 처참하게 들켜서,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안 와서 그대로 굳은 채로 어정쩡하니 웃었는데 생각보다 샤커는 화내지 않더라고. 실망하지도 않았고. 안 물어보냐고 하니까 너에게도 말 안 하고 싶은 일 정도는 있겠지, 라 답해와서 엄청 기뻤어! 샤커어~”
    “어이, 달라 붙지 마! 데이터 입력에 방해된다고!!”
    “으에엥!!”
    “…엣…그, 그렇지만…”
    “…실버짱은, 오르페브르를 믿어? 오르페브르는, 좋은 우마무스메야?”
    “…! 아, 아닐 리가 없잖아요! 오르페브르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정말 멋지고 소중한 제 담당 우마무스메에요!! 안 그런 아이 같아도 사람의 마음이라던가 팬들이라던가 제대로 신경 쓰고 있고!! …아.”
    “솔직히, 본인에겐 보여주기 싫은 일이라도 남들이 보기엔 제법 괜찮은 일일 때가 있어. …나는 큰 사정까지는 모르지만, 솔직히 보인 것만으로는 굳이 숨길 이유가 없는, 멋진 성과라고 생각해. …그리고, 네가 고른 그 담당 우마무스메가 네 말처럼 멋지고, 남의 마음을 알아주는 애라면- 숨기고 싶은 일을 들춰 버리고, 알아 버려서-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라, 오히려. …그리고 말이지, 계속 2인 3각으로 달려온 신뢰가 고작 그런 일로 깨질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거든! 실버 짱은 실버 짱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트레이너니까 자신감을 가져! 난 샤커라면 몰라도 그 오르페브르는 상상만 해도 걷어차여 쫓겨날 거 같거든~”
    “자랑이냐…”
    “…”
    “아, 그치만 오르페브르가 만약 날 걷어차지 않는다 해도 난 샤커가 더 좋아!”
    “그런 걸 물어본 게 아니잖냐!!”



    “오, 오늘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응! 다음에도 무슨 일 있으면 상담하러 와! 사실, 상담이라면 나보단 오토나한테 가는 게 나을 테지만.”
    “하아… 다음엔 이번에 데이터 수집 기회를 놓친 만큼 보상해야 할 거다…”
    “조, 조, 조만간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따듯한(?) 작별 인사에 고개를 다시 한번 꾸벅 숙이는 것으로 응답하고는, 실버는 주말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한산한 트레센 복도를 걸어 다시 트레이너 기숙사로 향했다. 솔직히, 격려를 들었다고 해서 완전히 자신감이 회복되었다기엔 자신은 겁이 많고, 아직 고민도 많은 답답한 사람이지만… 어쩌면 아주 조금은. …조금은 안도를 한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휴대전화는 고요했다. 오르페브르의 연락도, 신하들의 DM 방도 오늘은 조용한 것만 같다. 일단 오르페브르에게 오늘은 미안했다고, …주중에라도 좋으니 시간을 내어 제대로 사과와 그 일에 대한 설명을 하고 싶다고 보내놓고, 기분을 풀게 할 만한 것도 준비해야- 따위의 생각을 하던 실버의 발길이, 일순간 뚝 멎었다. 설마, 설마. 그리 불길한 생각은 걸음을 서두를수록 현실이 되어… 문 앞에 나타났다.

    “오, 오, 오르페브르…? 너, 설마 여기서 계속, …기다렸어??”
    “…여가 이곳에 있는 것이 불만인가?”
    “아, 아니 그게…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오르페브르가, 문 앞에 기댄 채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아까의 모습 그대로.



    실버는 집 안으로 돌아온 후 몇 가지를 깨닫게 되었다.
    첫 번째는 자신이 신고 나간 신발이 완전히 짝짝이여서 걷기도 뛰기도 힘들었다는 것,
    두 번째는 자신이 집에서 뛰쳐나가고 이곳으로 돌아오기까지 한 시간 정도가 지났다는 것.
    세 번째는 침실의 문이 닫혀 있는 걸 제외하면 집 안은 누군가가 청소라도 한 듯이 깔끔했단 것,
    네 번째는 오르페브르가 생각보다 화가 나 보이지 않는단 점이었다.

    무릎을 꿇지도 않았다. 오르페브르가 일단 앞에 무릎을 꿇고 보려던 제 팔을 살짝 잡아끌어 소파에 앉게 했기 때문에. 평소보다 아득히 연약한 힘인데 저항할 수가 없어서, 결국 실버는 냉장고에서 아이스티 두 잔을 따라오는 것으로 나름의 존경을 표했다. …쯧, 약간 달군. 혀를 차는 모양에 횡설수설 사과의 말을 담으려 하자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어 보이고는 잔을 전부 비운 뒤 한 잔을 더 요구하는 모양에 그대로 따랐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그 아주 잠시간의 시간이 영원처럼 무거웠다.

    침묵을 깬 것은 오르페브르였다. 말해 보거라. …그 짧은 한 마디에 실버는 저항할 수가 없었다. 이번 일 때문이 아니라 언제나 그랬다. 오르페브르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단 한 번도 거스른 적이 없었다. …그것은 3년이 다 되어가는 시간 동안 박힌 버릇 같은 것 중 하나였다. 그렇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유영하던 단어를 어떻게든 해체하고 조립하던 실버의 입에선 작은 목소리 하나가 툭, 나왔다.

    “그동안 숨겨서 미안해. ‘왕의 지팡이’에겐 있어서는 안 될 흠이라고 생각했어.”
    “…무엇을?”
    “…트레센 학원에 다녔지만 레이스 한번 해보지 못하고, 계약 한번 체결해 보지 못하고 그대로 졸업했단 거.”
    “…어째서 그렇게 생각했지.”
    “왕 ‘오르페브르’는 완벽하니까.”
    “…”

    쾅. 날카로운 소리가 컵을 내려놓는 소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깨지거나 망가지진 않았지만 잘 단련된 그 악력이 언제 컵을 깨트릴까, 란 두려움에 휩싸이기도 잠시, 제 손목을 잡으려고 했던 손이 마지막 순간 주춤해서 허공을 쥐었다. …그것을 잠시간 놀란 눈으로 멍하니 보고 있자면, 고개를 떨군 그녀의 목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항상, …그런 식이군.”

    …실버는 이 목소리를 알았다. 너무나 잘 알았다. 도저히 지워지지 않는, 절대 잊어선 안 될 기억이다. 어둠에 잠긴 트레이너실. …그곳에서 네가 들려줬던 목소리와-

    “분명, …혼자 두지 않겠다고, …맹세한 주제에.”

    …너무, 닮아 있어.
    정신 차리니 손목을 잡아채고 있었다. 오르페브르는 구태어 그걸 뿌리치지 않았다. 얼굴을 보여줘. 싫다. …보여줘. 몇 번인가 같은 말로 이어진 실랑이는 결국 오르페브르가 얼굴을 드는 것으로 끝났다. …그때의 얼굴과 닮아서, 실버는 손목을 잡은 것을 놓고 빈 손을 잡았다. 장갑 너머로 체온이 전해지기를 바라면서, …구태어 손에 넣은 힘을 줄이지 않았다.

    “꿈, …꿈을 꿨었어. 분명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자만했는데, 결국 아무것도 붙잡지 못했어.”
    “…”
    “그렇게 꿈을 놓쳐버리고 나니까 내가 너무 부끄러웠어. 일생에 한번 있는 기회를 놓치고, 인생을 스스로 망쳐 버린 것만 같아서. …내 스스로가 싫어졌어. 남들에게 나를 보여주기 부끄러워졌어. 세상엔 모두 꿈을 이룬 사람의 이야기만 담겨서, 꿈을 놓친 내가 더욱 평범하지도 못한, 비참한 삶을 스스로 만든 사람 같아서 스스로가 싫었어.”
    “…”
    “그렇게 스스로를 계속 깎아내렸어. 내가 살아가는 삶엔, 이야기엔 가치가 없는 것만 같아서. 스스로가 무언갈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 인생을 스스로 망쳐버린 내가, 꿈을 놓쳐버린 내가 뭘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무서웠어.”
    “…”
    “그런데 너가, 네가 나한테. …기회를 줬어. 그래서 무서웠어. 좋았어. 엄청 좋았어. 내가 드디어 조금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거 같아서. 근데, 완벽한 너에게 나 같은 건 어울리지 않으니까. 결점 투성이인 내가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버려질 거 같아서. 계속 무서웠어. 내 추한 것들을 모두 들키면 너도 날 버릴 거라고 생각했어.”
    “…”
    “그래서…개선문상 이후에, 네가 날 잡았을 때 놀랐어. 내가 필요하다고 했을 때 기뻤어. 나도 날 쓸모없다고 생각했는데, 너 만큼은 날 필요로 해준다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너무 기뻤어. 근데, 이런 걸 숨긴 걸 알게 되면. 실제로 성적도 하나도 못 내고 의미 없이 졸업한 걸 보면 신뢰도 깨지고 날 싫어하게 될 거라고 생각해서, 머리가 하얘졌어. 너무 무서워서, 도망치고 싶었어. 네가 나를 따라오면, 나를 붙잡고 이야기를 하면… 내가 싫어졌다거나, 질렸다고 할 거 같아서. 넌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으면서도. 내 손목을 잡았을 때, …실수했다고 생각했잖아.”
    “알, 면서…알면서…!”
    “…숨겨서 미안해. 도망가서 미안해. …이젠, 난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어?”
    “네 , 놈은…여의 선택을, 믿지 못하는 것이냐…? 이 내가, …고른 것이… 고작 그런 것으로 실망할 정도로, 믿지 않았다면… …곁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구나. 사실, 조금 뭐 한 말이긴 한데… 그렇게 말해줄 거라고, 생각했었어. …뭔가, 고마워.”
    “…네 놈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마. 대신- 하나 정도는, 받아가마.”
    “에?”
    “…이번만큼은, 도망치지 말거라.”

    아플 정도로 손목이 붙잡혀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겠단 생각이 들면, 이내 입가에 쪽, 하는 소리와 함께 닿은 부드러운 감각이 선명해 머리가 핑, 돈다. …이거, 분명히, 내가 아는. 대체 이게 무슨- 따위의 말은 할 틈도 없이 살짝 벌린 입의 틈으로 부피감을 가진 눅진한 살덩이가 침입해 어설프게 안을 휘젓는다. …자신이 아는 체온과 같은 온도, 아니, 그보다 조금 더, 체온으로 데워져 따뜻한 것이. 
    첫 키스는 레몬 맛이라는 속설을 믿는 건 아니었으나 첫 키스가 손목의 통증을 동반할 것이라고는 상상치 못했다. 그런데도 통증은 머리를 맑게 해주기는 커녕 더 흐리게 했다. 숨은 들이키는 족족 탐욕스러운 입맞춤에 먹혀들었고 그것을 어떻게든 떨쳐내고 숨을 쉬려 질 세라 혀를 얽히니 아직 경험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듯이 어느샌가 먼저 입을 맞춘 쪽의 눈동자가 더욱 흐렸다. 눈물 따위는 흐르지 않았으나 생존 본능과도 닮은 것으로 상대의 숨까지 탐욕스래 삼켜냈더니 입에 틈새가 조금이라도 생길 때마다 콜록거리는 작은 기침 소리가 거친 숨소리에 섞였고, 이미 타액은 턱을 타고 흘러 바지를 더럽히기 시작한 지 꽤 되었다. 이거, 신하로서 혼나려나. 바지, 세탁해야 하는 거 아닐까? 이상하게도 산소가 모자란 머리엔 그런 생각만 들었다.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이 빠져갈 때 즈음 입을 떼자 누구 먼저라 할 것 없이 기침이 터져 나와서, 한동안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머리에 그제야 제대로 숨이 돌아서,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각하고 얼굴에 슬금슬금 열이 오를 때가 되자 오르페브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돌렸다.

    “돌아간다. …다음 주까지는 휴식하겠다. …이의 없겠지.”
    “…네, 에.”
    “그래. …다시는…잊지 않도록 해라.”
    “…응.”

    오르페브르를 줄곧 배웅하면서 고민했다.
    지금 꼬리가 꽤나 기분 좋은 듯이, 혹은 부끄러운 듯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짚어줘야 할까 싶어서.
    그러나 말할 수 없던 것은-
    무심코 매만진 그 입술 위에 아직 사라지지 않은 황금의 잔향이 남았기 때문이었을까.
    잘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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