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내부는 조용했다.
창 밖에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나 샤워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소리, 그것이 찰박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날 뿐.
실버 폰타인은 연마제를 바른 손수건으로 제 귀에 달고 다니던 귀걸이를 문질러 닦으며 생각했다.
…어째서 나는 이러고 있는가.
어째서 나는-
덜컹, 문이 열린다. 수건으로 특유의 머리카락을 감싸고 물을 떨구며 나온 오르페브르는, 변함없이 당당한 태도로 이 쪽을 응시하고 있다.
실버는 저도 모르게 어정쩡하게 몸을 팔로 가리면서 생각했다.
…어째서- 오르페브르와 나는, 지금 같은 호텔방의 같은 침대에서, …자게 된 거지?

계기는 단순하다.
오르페브르에게 들어온 지방 행사 참가 요청. 상당히 대형 행사였고, 행사의 콘셉트나 취지도 오르페브르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 제안했더니, 처음엔 여가 백성들을 위해 행차해야 하냐며 불쾌감을 드러내던 오르페브르도 어린아이들이 쓴 것으로 보이는 오르페브르가 행사에 오면 좋겠다, 는 수십 통의 편지를 보고서는 마음이 누그러진 것인지 흔쾌히 수락했다.
당연하지만 그 후에도 큰 문제는 없이 행사 준비는 진행, 마침내 찾아온 행사 당일, 이벤트 레이스에서도 오르페브르는 승부복의 망토를 멋들어지게 펄럭이며 압도적인 승리를 보여주는 것으로 행사는 완전히 대 성황. 그 외에 특별히 큰 문제가 일어나지도 않고, 날씨도 화창하니 정말 나쁜 일 하나 없던 날.
오르페브르와는 행사에서 할 일이 끝난 후 노점을 돌기도 하고, 팬들에게 싸인을 해주거나 어린아이들과는 기념 촬영, 거기다 오르페브르의 희망으로 근처 디저트 거리를 돌며 유명 디저트집에서 그녀에게 디저트를 현상하는 시간을 즐기기도 했는데-
…문제는 그 이후 발생했다.
저녁 즈음에 날이 안 좋아진다는 이야기는 있었지만, 그 정도로 비가 쏟아질 줄은 몰랐다. 당연히 도로는 꽉 막히지, 하늘에선 장대비가 쏟아지지, 교통체증과 최악이라 해도 좋을 날씨 탓에 지금 당장 출발한다 해도 도착은 커녕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
결국 없는 자리를 뒤지고 뒤져서 겨우 찾은 하룻밤 묵을 숙소는- 그래, 방은 하나, 침대도 단 하나. 

…그리고, 지금에 이른다.
카펫 깔린 바닥에 물이 떨어져 왕의 행적을 새긴다. 잠시 손에 든 것조차 잊고 바라보고 있자면 툭, 손수건과 빗이 품에 던져진다. 손질하거라. …그 말에 급히 손에 묻었을 연마제를 닦아낸다. …귀에 다시 귀걸이를 끼우면, 왕을 위한 치장의 시간이니까. 

계기는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늦잠을 자서 급하게 나온 날, 꼬리를 손질하는 걸 까먹어서 뒤늦게 엉킨 꼬리털을 빗질하고 있자면 이내 오르페브르가 그것을 전부 바라보고 있다가 빗을 놓으려는 날 제지했다. 여의 꼬리를 손질하는 영광을 주지. 담담하게 말한 그녀에게 제안받아서, 지금에 이른다. 어느샌가 이것도 몇 년에 걸친 일상이 되었다. 오르페브르는 항상 몸가짐을 완벽히 하고 다니는 데다 집에서는 보통 그녀의 언니- 드림 저니가 관리를 돕는다는 것 같아 내가 그녀의 꼬리를 손질하는 것은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니다. 많으면 주에 한두 번,  적으면 2주에 한 번. 기간은 전부 오르페브르의 뜻대로. 관리 제품은… 전부 자신의 것으로. 원래 쓰는 것이 더 괜찮지 않겠느냐고 늘 물어도, 오르페브르는 답을 해주지 않아서 언젠가부터는 내 것과 같은 것을 쓰는 게 일상이 되었다. …내가 오르페브르보다 꼬리털 관리에 신경을 쓰는 것도 아니란 걸 알고 있을 텐데 참 속도 모를 일이다.
주황빛-내지 밝은 노란색에 가까운 털이 손가락 사이에 얽힐 때 미세한 몸의 떨림이 느껴져 얼굴을 돌아보면 그녀는 늘상 언제 그랬냐는 듯이 덤덤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나는 보통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고운 빗으로 털이 엉키거나 빠지지 않게 신경 쓰며 털을 빗는다. 손으로 꼬리를 가볍게 쥔 것이 막힘 없이 두어 번가량 빗질이 되고 꼬리털에서 윤이 나면 보통 손질은 끝난다. 수고했다. …그리 말을 남긴 채 허공에 펄럭이는 꼬리를 잡지 않는다. 잠시간 이어지는 정적에 숨이 막힌다.

“…슬슬 잘까?”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는다. 이럴 때면 마치 몸을 따끔한 것으로 찌르는 듯한 감각에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키고 시선을 피하게 된다. 이 분위기가… 단적으로 약간 불편하니까.
… 자신이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깨닫게 된 건 최근에 들어서였다.
계기는 아주 사소했다. 선배들과 이야기하며 나왔던, 미래와 후대에 대한 이야기. 자신도 당연히 생각하게 되는 미래에 관한 것들. 솔직히, 기대가 되어 참을 수 없었다. 트레이너가 되어서, 오르페브르처럼 멋진 아이를 담당할 수 있던 것은 아직도 자신에겐 기적과도 같고, 멋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지팡이로써, …후대를 온전히 키워내어 왕의 패도를 이어나가는 것도 신하의 일이 아닐까.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기에. 
그리고 그 이야기를 꺼낸 오르페가 엄청나게 화를 낸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챌 정도의 눈치는 있었을 뿐이다.
…기분이 예민한 날 그런 것이 문제인가 싶어 기분이 좋아 보이던 날 말해도 화낸 것을 눈치채고서야-이것은 역시 내 잘못이었다고 생각은 하지만-도움을 청하고 상담을 청했다. …아직도 기억난다. 벼락이라도 맞은 줄 알 법한 선배의 놀란 얼굴을.

“…그거, 청혼 아니야…?”
“…예?”
마시던 것이 입에서 뱉어져 나올 뻔했다. 한동안 쿨럭거리며 알코올 특유의 씁쓸하고 독한 향이 보리 특유의 향과 섞여 목 안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을 수습하고 있자면 이내 들려온 말은 더 믿기도 싫은 것이다 보니.

“…미래를 달라고 했다고 했지. …그거 상식적으로 어떻게 들릴 거라고 생각해?”
“…두 말 할것도 없이, 청혼이죠…”
“거기다, 그 오르페브르가 ‘기다리면 자연스레 손에 들어올 것이다’라고 했다면… …사실상 받아들였다고 생각하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저는…담당에게 먼저 청혼을 해놓고, 다른 담당이 어쩌니~ 같은 소리를 해서 오르페브르를 화나게 해 버린 거라고요…????”
“…응…”
“거짓말이죠????”
“…”
선배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쓴 웃음을 지으며 눈을 피했다. 그 모습에 얼마나 내가 절망했었는지는 말을 더 할 필요도 없겠지. …솔직히, 그 말이 아예 걸리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만, 그때는- 몇 번이나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단 죄악감에, 그녀를 외롭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조금 기세를 타서 말해버린 것이고, 괜찮을 것이라고… …아니, 정정하자. 저런 말을 해놓고 괜찮을 거라고 낙관적으로 본 내가 바보 멍청이에 머저리라고! 애초에 입맞춤을 해버린 순간부터 약간은 각오하고 있었잖아? 내가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했을 뿐이지! 좀 더 진지하게 그때부터 우리 둘의 관계에 대해 생각했어야 하는 거 아냐?? 바보야!! …라고 외쳐봐도 과거의 나는 돌아보지 않는다. 이제 남은 건 심기가 꽤나 거슬려진 오르페와 아무 생각 없이 저런 진지한 말을 마구 내뱉은 답도 없는 나, 그리고 둘만 남은 호텔방과 하나의 침대, 약간 어색한 분위기다. …사실, 저 일을 자각한 이후엔 오르페브르와 최대한 가까이하지 않으려고 했다. 딱히 싫어졌다거나, 하는 건 아니고 머리를 정리하고 싶었다. 나 스스로가 한 행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책임져야 할지, 나와 너의 미래는 어떻게 되어야 이상적일지. …어쩌면 아직, 늦지 않았으니 바로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리 낙관적으로 생각한 벌을 받는 걸까.

입이 일순간 막혔다. 숨을 찾으려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드니 그것을 집요하게 머리가 따라가서 결국 몸이 점점 기울어지다가 풀썩 침대 위로 몸이 쓰러진다. …기분이 좋다, 까진 아니지만…여전히 힘 조절을 잘하지 못하는 오르페브르는 아직 약간 아프게 손목을 잡아서. 이제는 손목을 잡는 것이 은근한 함의인가, 싶기까지 해서. 아니면 그때의 경험이 강렬한 것처럼 뇌리에 박히기라도 한 걸까. …결국 그것을 함의가 아닐까, 라 짐작할 정도로 이것에 익숙해지고 만 나도, 나지만.
약간의 저항을 더해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면, 그제야… …눈앞에 반짝거리는 색채가 어두운 방이라는 것을 잊을 정도로 두 눈앞을 가득 채운다. 

…이럴 거라고 생각했다. 오르페브르는 아직 어리니까. 잠시간 저항을 포기한 듯 몸에서 힘을 빼면 그제야 힘이 들어가던 손목이 손에서 놓아진다. …또 한 번 불편한 정적을 이어가다가… 겨우 말이 이어졌다.

…왜 피했지? 피하지 않는다고 하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고, 결론을 내렸어. …널 납득시킬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해. 들어줄래?
…쯧… 말해보거라.

화난 오르페브르를 납득시키려 할 땐 조금이라도 더 자신감 있게. 아무것도 무섭지 않다는 듯이, 눈에 힘을 주면 한 발짝 물러나준다. 그게 정말로 압박이 되는 건지, 아니면 연약한 짐승의 발악 정도로 보이는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최소한 이렇게 하면 화를 내는 걸 멈추고, 제대로 이야기를 들어주니까. 일부러 손목을 잡은 손을 뿌리치진 않고 말을 이어갔다. 

“많이 고민했어. …그치만 지금 계속 진지하게 뜻을 보여온 너에게 거짓말이나 확실치 못한 의견 따위로 치부하는 건 널 모욕하는 거라는 걸 알고 있어. …많이 생각했지만 조금 기세를 탄 말이라 해도 네 미래를 가지고 싶다는 것도, 널 다신 외롭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것도 진심이야.”
“…그 말에 거짓은 없겠지.”
“지, 진짜야. …그리고 전에 화나게 했던 것도 미안해. 나는 그냥… …너와는 당연히 같이 있을 테니까. 너를 계속 보필하는 건 지팡이인 내 일이잖아? 그래서… 너랑 떨어진다, 는 전제를 생각지 않고 한 말이었어! 너를 버린다거나, 하는 건 절대로 생각지 않았으니까??”
“…흐응, 그런가. …좋다. 그 말에 거짓이 없다는 것에 맹세할 수 있겠지. …너라면.”
“당연하지!! 너, …너에 대한 마음에 거짓 따위는 항상, …없었어!!”
“…네 놈은 전부터 ‘스스로 무덤을 파는 소리’ 만 하는군.”
“…그, 그런 말 말고 빨리 비켜줘. …그게, 그러니까…”
“하아? 여가 신하의 위에 자리하는 것이 싫다는 게냐?”
“…이래저래 부끄러운 곳이 보일 거 같다고!! 너 목욕가운인 거 잊은 거야?! …거기다 뭔가, 뭔가, 그러니까, 좀 아니야!! 이건 불건전해!! 우마무스메와 트레이너의 좋은 거리감이 아니라고!!”
“쯧… 시끄럽기는.”

…시큰거리는 손목을 무심코 쥐려던 제 손을 의식적으로 제지하고 자유로워진 몸으로 침대에 걸터앉는다. 뭔가 중간부터는 반쯤 침착을 잃어서 부끄러운 말을 한 거 같기도 하고. …인정해버렸다는 건 알아. …피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아. 솔직히 다 알고 저지른 건데도… 왜 이렇게 두렵기만 한지. 울렁거리는 속을 침대보를 쥐는 것으로 진정시키려 노력하면…- 
일순간 손이 겹쳐진다. 손등 위로 겹쳐진 손이 깍지가 껴지고 단단하게 잡은 손의 손가락이 얽힐 때마다 놀라 몸을 떨었다. 

“…왜 그렇게까지 불안해하지? 여의 반려로서 좀 더 당당한 태도를 취하거라.”
“바, 반려…”
“…쯧, 용기 없는 자식…”

…그러니까, 그 뒤의 일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젠 돌이킬 수 없다는 불안감과 내가 왜 그동안 차일피일 애매하게 선택을 미뤄왔는지- 에 대한 대가를 치루어서 불안해하고 있던 차에 이번엔 손목이 아닌 손을 잡고서 입을 맞췄다는 것 이외엔. 솔직히, 조금 무서워서 숨이 가빠져 있던 차라 숨을 쉬려 아등바등 몸을 움직이고 숨을 쉬려 노력하다가 네가 먼저 입을 떼면, 어쩌면-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네 쪽을 몰아붙이듯 갈급하게 입을 맞추다가, …결국 네 쪽에서 먼저 입을 떼고 기침을 연신 해대며 약간 열감이 오른 고개를 푹 숙인 것을 보고서야 정신이 살짝 들었다. …우마무스메들은 흥분 자체에 민감하고 러너즈 하이로 인해 위험할 수 있다는… …그런 주제는 제법 봤지만 내가 대상일 거라곤 생각 못했는걸… 그것도 이런 쪽에선. …겁을 먹으면 눈앞이 하얘져서 무작정 도망가고 싶어지는 것과 비슷한 이치일까? 한참 콜록이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주려고 하면, 다시금 손을 잡힌다. 겨우 기침이 잦아든 그녀가 두 손을 잡았다.

“…당장 고치라고는 하지 않겠다. …그래도 도망치지 마. 약속했을 터다. …너는.”

어딘가 조급한 듯도, …그러면서도 제 딴에 해낸 어설픈 배려도. 시선을 슬쩍 피하며 꼬리를 움직이는 모양까지도… …문득 웃음이 나왔다. 왜 이리 무서워했던 건지, 잠시 스스로가 바보 같다 느껴질 정도로. 오르페브르가 주의를 주어도 한동안 폐부에 바람이라도 뚫린 것인지 웃음이 비집어 나와서- 결국 웃음이 번져 함께 침대에 누웠다. 돌아누워선 서로 쿡쿡대며 스스로도 뜻 모를 이야기를 해대며 손을 맞잡고 이마를 마주대었다. 눈이 감길수록 목이 메어 결국 나온 것은 아주 작은 진심이었다. …좋아해. 작게 웃으며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왜인지 오늘은 아주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거 같아. …그리 기대감을 하고 눈을 감으면-

“…그래. …기대되는군. …우리의 아이는.”
“…잠깐, 뭐???”
…와락, 분명 방금까지 졸려서 감겨오던 눈이 번쩍 뜨였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지? 아이? 아이?? 내가 아는 그 아몬드 아이도 아니고 진짜? 아이? 자녀??? …그리 집요하게 물어오자 약간 부끄럽다는 듯이, …오르페브르의 입에서 나온 소리가 내 상상도 상식도 초월했다.

“당연한 것 아니냐. 침대에서 사랑하는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자면 아이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거늘.”
“드…”
“…? 네 놈 왜 표정ㅇ-”
“드림 저니 씨이이이이이 애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예요-!!!”
“네 놈, 갑자기 누님은 왜…?”
“…그러니까 손 잡고 잔다고 아이는 안 생기거든???절대로?!?!”
“하??”

…이후, 다음 날 아침 둘이 무사히 손을 마주 잡고 학원으로 돌아온 것도, 
돌아온 오르페브르와 드림 저니가 진지한 면담을 하게 되었다는 것도,
드림 저니에게 오르페브르에 대한 ‘응석 받아주기 금지령’ 이 내려진 것도,
조금, 이후의 이야기.

 

 

'🏇💤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폭군을 부수는 방법  (0) 2025.05.05
떨어진 왕관은 두 번 다시 짜맞출 수 없다  (0) 2025.04.26
勅命巨役  (0) 2025.03.07
폰타페 커미션  (0) 2025.03.04
잉크빛 여로라도 괜찮다면야  (0) 2025.02.27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