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와-! 대단해…”
“너무 경거망동하지 마라. 왕의 위신에 흠을 낼 생각이냐?”

오늘, 나와 오르페브르는 한 방에 와있다. 탁 트인 넓은 공간을 창문 하나 없이 전부 고급스러운 종이로 감싼 스튜디오 같은 넓은 방에. 간간이 보이는 것도 사다리나 페인트통 정도가 전부인 이 넓은 공간에, 우리는 마치 배색을 맞춘 듯 흰 옷을 나란히 맞춰 입고 있다. 
계기는 지난번, 오르페브르가 친언니인 드림 저니 씨를 비롯한 몇몇의 우마무스메와 함께 촬영했던 어느 굿즈 회사와의 콜라보 기획이었다. 그 기업은 전에도 여려 G1 우마무스메와 콜라보를 하면서 고수하던 콘셉트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페인터 콘셉트이다. 페인트가 묻어 알록달록한 흰색 옷과 각자에게 어울리는 배색의 페인트, 그리고 몸에 묻거나 입에 들어가도 유해하지 않은 성분의 특수 페인트를 이용해 마치 페인트를 알록달록하게 칠하는 것만 같은 콘셉트의 화보를 찍는 것이다.
당연히 저명한 굿즈 회사와의 콜라보를 거절할 이유는 없었고, 화보 촬영도 문제 없이 끝났다. 거기다 굿즈 판매도 대성황. 오르페브르의 굿즈는 인터넷에서 추가금이 붙을 정도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물론 되팔이는 안 좋은 것이긴 하지만, 오르페브르가 그렇게나 큰 인기를 사고 있다니 트레이너로서 기쁜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오늘 나와 오르페브르가 이 곳에 일부러 옷까지 갈아입으며 도착한 이유는 바로 그 페인터 기획과 관련이 있다. 이번에 기획에 참여했던 우마무스메들을 대상으로 아직 체험 서비스 단계인 페인터 스튜디오를 체험 방문해 주면 좋겠다고 연락 메일이 왔던 것이다. 혹여나 해서 오르페브르에게 물어보자 의외로 단번에 수락했고, 오르페브르가 혼자 스태프들에게 어떤 짓을 시킬지 몰라 자연스럽게 내가 동행하는 것이 되어서 지금에 이른다. 

“그건 그래도 역시 대기업이라는 건가…이런 독성 없는 특수 페인트라도 엄청 비쌀 텐데, 이 종이도 엄청 고급 종이야…”
“그런가…”
“오르페는 잘 모르겠구나. 나는 만년필 때문에 필사 취미가 있어서 알거든. 이 정도로 좋은 종이면 뒤로 잘 새지도 않고, 페인트를 마구잡이로 뿌려도 울지 않을걸? 이야~ 나도 이런 고급 종이를 방 안에 치덕치덕 칠해놓을 정도로 사치를 부리고 싶네…만년필 가져와서 하루 종일 글만 써도 즐거울 거 같아…”
“…네 놈, 그렇게나 탐닉하는 건가…어쩔 수 없지. 네 놈은 여의 것이니 특별히…-”
“실례합니다~! 페인트 도착했으니 받아서 즐기시면 됩니다~! 체험 시간은-”
“아, 페인트 왔대! 오르페, 미안. 잘 못 들었는데 방금 뭐라고 했어?”
“…아무것도 아니다.”



“으음…슬슬 할 거 다 해버렸지…? 시간은…”
“슬슬 무료해지는군.”

…약 한 시간 정도 지난 후. 나와 오르페브르는 처음엔 꽤 재미있게 놀았다. 페인트를 들고 화보처럼 포즈를 취한 채 사진을 찍어보기도 하고, 서로의 얼굴을 그려보거나 무작정 페인트를 종이에 뿌리기도 하고…하지만 그것도 한 시간쯤 지나니 꽤나 소재가 떨어져서 우리 둘은 어딘가 김이 새선 무작정 종이 바닥에 앉아있는 채다. 그렇지만 업체에서 알려줬던 시설 이용 시간은 아직 30분이나 남아있는 상태. 그렇다고 이런 곳에서 무료하게 시간 죽이기를 하는 것은 오르페브르가 실망할 일이라는 건 확실하다. …분명 오르페라면 실망의 말을 스태프들에게 말할지도 모르고… 그런 건 역시 피하고 싶다. 잠시 페인트와 종이, 그리고 오르페브르를 번갈아 바라보던 내 머리에… 문득 전류 한 줄기가 튀었다.

“지루하지, 오르페!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는데, 게임 하나 할래?”
“…게임?”

페인트와 두 사람. 그걸 보자마자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유명 게임사의 대전 게임이었다. 이 게임에선 직접적으로 싸우는 게 아닌, 페인트를 이용해 상대보다 더 많은 구역에 페인트를 칠해서 색의 비율이 더 많은 쪽이 이기는 게임이라고. 직접 해 본 적은 없지만 우마튜브 실황이나 신작 광고 따위로 자주 본 게임이었다.

“그러니까 그 게임처럼 서로 누가누가 더 많이 색칠하는지 겨루는 게임을 하자는 거야! 어때?”
“네 놈… 여긴 이미 엉망이지 않느냐.”

오르페브르의 지적도 합당했다. 우리가 제법 잘 즐긴 덕분에 우리가 앉아있는 바닥 구역도 페인트가 이리저리 튀어있는 데다, 벽면은 우리 둘이 그린 그림과 무작정 페인트를 뿌리고 칠한 자국으로 엉망이었다. 분명 이런 곳에서 페인트 칠하기를 해도 제대로 승패를 판별할 수 없겠지. 그렇지만, 내가 그 정도도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그러니까 벽이나 바닥 대신, 서로를 색칠하는 거야!”
“서로를…?”

오르페브르는 페인터 컨셉트 촬영 때 썼던 의상을 입고 있다. 팔이나 다리에 페인트가 튄 것까진 재현하지 못했지만, 의상엔 저번 촬영 때의 페인트 자국이 남아 있다. 그리고 나도, 오르페브르와 세트로 맞추어 콘셉트에 맞게 조금 헐렁한 흰색 반팔 티셔츠와 흰색 반바지를 입고 온 참이다. 아무리 당장 버려도 상관없는 옷을 입고 왔다고는 해도 옷이 젖은 채 움직이는 건 불편하니 둘 다 크게 페인트가 묻지 않도록 하며 놀았어서, 옷은 둘 다 크게 더러워지지 않았다. …그래, 옷은 깨끗하다는 것이다. 마치 흰 도화지처럼!
그 쯤 되자, 오르페브르도 이해한 듯 눈을 빛냈다.

…더 말은 필요 없었다. 오르페브르는 물감이 가득 담긴 전용 잔의 손잡이를 집고, 나는 페인트붓을 물감에 푹 담가놓고 흥건하게 만들었다. 얼굴이나 머리카락을 더럽히는 건 반칙. 그런 룰로, 시작- 을 외친 직후.

“네, 놈…!!”
“우, 와아아아?!”

입가에 미소를 걸고 저를 덮쳐온 오르페브르에게 그대로 넘어졌다.
다행히 오르페브르는 힘 조절을 했는지 가볍게 넘어졌지만. 오르페브르와는 지금 서로를 페인트로 칠하는 게임 중이고 오르페브르는 손에 페인트가 가득 담긴 잔을 쥐고 있다. 아, 이거 위험하다- 그렇게 생각한 직후, 제 옷 위에 그대로 금색 페인트가 주르륵 부어졌다.

“으, 와?! 차가, 웟?! 차가워, 차가워 잠깐 거기 만지지 마, 아하하하하학…!!”
“순순히 항복을 외치고 여에게 복종하거라, 지금이라면 특별히 용서해 주마…!”
“에에?! 내가 왕님을 이겨볼 수 있는 얼마만의 기회- 아핫, 차가…! 뭐야 이거~! 기분 완전 이상해, 옷 위에 로션 바르는 거 같아! 아아, 거기 간지러우니까 진짜 그만…!”
“네 놈…여에게 항복하지 않겠다니, 그렇다면 용서 따윈 없다! 네놈의 입에서 항복을 받아내어 주마…!”

연신 네 놈을 연호하는 오르페브르지만, 기분이 불쾌한 기색은 없고 한참 들뜬 채다. 거기다 나도 간지럼이나, 옷 위로 느껴지는 페인트의 미끌미끌한 감각 때문에 한참 웃느라 어딘가 들떠있어서, 평소라면 순순히 입에서 뱉었을 항복 선언을 일부러 꾹 눌러 참았다. 그 덕에 결국 페인트는 한껏 제 옷을 더럽혀서, 결국 상의는 아예 금색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앞면이 얼룩덜룩 흠뻑 페인트칠이 된 데다, 상의를 더럽히고 남은 것은 흘러 바지를 더럽히기까지 해서… 바지조차도 금색 얼룩이 크게 남은 형태가 되었다.

“우와~ 옷 완전 엉망진창…갈아입을 옷이 있다곤 해도 무자비해 오르페… 이게 폭군인가~”
“네 놈…뭘 끝난 듯이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네 놈이 항복을 들을 때까지 그만두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응? 우, 왓?! 배, 배를- 햐악?! 차, 가!! 우와, 이거 간지럽…! 아하하하! 간지러, 간지러워 오르페브르…!”

오르페브르가 상의를 들어올려 배를 노출시켰다, 는 위기감도 잠시. 주르륵 배 위로 흘려지는 페인트와 그것을 펴 바르는 오르페브르의 손이 간지러워서 결국 또 한껏 웃었다. 로션을 바르는 거 같은 묘한 감각까지 더해지니, 도저히 웃음이 참아지지 않았다. 오르페브르도 어딘가 신난 얼굴로 마구 내 배 위에 금색 페인트를 펴 바르고 있으니, 결국 우리 둘이 일으킨 소란은 한참 이어졌다. 게임의 승자는… 뭐, 내가 단 한 번도 오르페브르에게 유의미한 공격을 하지 못한 시점에서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고 말이다.

“여에게 쓸모없는 저항을 해봐야 소용 없다는 것을, 잘 깨달았느냐?”
“너무 잘 깨닫게 됐잖아…우으, 축축해애~”
“네놈이 제안한 규칙이니, 감안하도록.”
“너무하잖아…뭐, 그래도 내가 진 건 사실이니까 이따가 돌아가면서 맛있는 거라도 사줄게. 그보다 정말, 대단하네… 나, 옷 위도 몸도 전부 오르페브르의 색으로 물들어 버렸어…”

그리고 그 말 직후, 오르페브르의 몸이 크게 움찔했다. 말을 잃은 것인지 놀란 눈으로 얼굴을 빨갛게 하고 있는 오르페브르는, 보자마자 나도 웃음기를 잃었다. …에? 어째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면, 순식간에 공기가 이상해져서… 나도, 왜인지 얼굴에 열이 오르고 순식간에 더웠다. 잠시간 이어진 침묵 속 먼저 말을 꺼낸 건 오르페브르였다.

“…돌아갈까.”
“아, 으, 으응…”

다행인지, 불행인지. 시간은 5분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아 우리는 약간 홧홧해진 얼굴로 방에서 나올 수 있었다. 잠시 관계자에게 간단한 질의응답을 끝내곤, 옷을 갈아입고 몸을 씻을 수 있는 욕실을 소개받아 들어가게 되었다.

페인트로 엉망이 된 옷을 벗고, 몸을 씻어낸다. 다행히 특수 제작 페인트라는 말이 허언은 아닌지, 물이 닿자마자 금세 씻겨 내려가는 페인트를 보면서 조금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배 위에 아직 얼룩덜룩 남은 페인트 자국이, 자꾸 아까의 일을 떠올리게 만들어 얼굴이 절로 홧홧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까 아무 생각 없이 했던 말이 터무니없는 발언이라는 건 금방 생각할 수 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던 거지… 오르페브르, 아까 분명… …기분, 나빴을 거야. 응. 그럴 거야… 그리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데, 샤워실의 문이 철컥, 소리를 내며 단숨에 열려 놀라 몸을 가리고 말아.

“오, 오오 오르페브르?! 왜, 왜 들어온 거야?! 애초에 욕실은 1인 1실이었고, 너는 거의 더러워지지도 않아서 다 씻었잖아?!”
“네 놈…씻어내는 건가.”
“다, 당연히 씻어내야지…! 페인트를 묻힌 채로 돌아다닐 수도 없고, 옷 금방 갈아입어야 하는데…!”

타월 한 장으로 몸을 가린 오르페브르가 성큼성큼 다가온다. 특유의 향이 비강을 채우고, 따뜻한 몸이 닿는 감각은 역시나 이상하다. 얼굴이 홧홧했다. 욕실의 열기 탓인지, 오르페브르도 그랬다. …이건, 어딘가 이상하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도 떨쳐낼 수 없다.

“네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했지만… 역시, 네 놈을 여의 색으로 완전히 물들이고 싶다. 그런 생각이… 계속, 계속 들어서…네 놈은…”

자기가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알고는 있을까. 얼굴이 터질 듯 붉은 건 똑같은데, 자기만 혼자 진지한 얼굴로 그런 말이나 하고. 더는 참을 수가 없어 손을 깍지 껴 잡는다. 어딘가 번민하는 시선 탓에 얼굴에 열이 몰려 터져 버리더라도…

“그러면, 그렇게 하면 되잖아…”
“읏…!”

잠시 서로의 눈을 마주 보다가, 오르페브르는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며 급히 욕실 밖으로 나갔다. …나도 마찬가지로, 전부 페인트를 씻어내고 다시 평소에 입던 사복 차림을 한 채 스튜디오를 나왔다. 
석양이 지는 거리를, 손을 꽉 잡고 걷는다.

“…오르페. …어떤 게 좋아? 아까 내기의 보상인 맛있는 거.”
“…네 놈의 집에 방문하도록 하지. 여를 위한 식사를 준비하거라.”
“그걸로 괜찮으려나…? 알겠어. …후후, 이것도 뭔가 물들이는 거 같네…”
“…?”
“위장을 나의 색으로 물들이는 거 같잖아. …우린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서로를 물들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네.”
“…흥.”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얽힌다. 손가락이 서로의 손 틈새를 파고든다.
석양빛이 둘 사이에 스며들어 반짝인다.
실없는 이야기를 하며, 두 명의 우마무스메가 석양 속으로 스며들어 간다.
맞잡은 손에서부터 서로를 서로의 색으로 물들여 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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